낮은 재즈가 흐르는 어두운 바였다. 원목 카운터 위엔 물방울이 맺힌 위스키 잔이 두 개 놓여 있었고, 그 사이에는 한 사람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난초는 스툴에 앉아 잔을 기울이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두 눈을 가늘게 접은 실눈이었으니까.
블랙 하이엔드 캐주얼. 5:5로 가른 흑발. 목의 왼쪽에는 나비 문양의 타투. 그런데 그 눈빛이——이상했다.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안죽림 | "실례가 안 된다면, 옆자리 좀 앉아도 되겠소, 아가씨? 카운터가 꽉 차서."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능글맞은 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온도가 달랐다. 자신을 처음 보는 자의 것. 호기심은 있으나, 집착은 없는.
안죽림이 스툴에 앉으며 바텐더에게 손짓으로 위스키를 주문했다. 그러다 다시 난초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안죽림 | "……이런. 미안하오. 초면에 실례요만, 아가씨 얼굴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티비에 나오는 분이시오?"
고개를 갸웃하더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는 듯 실눈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위스키 잔을 받아 한 모금 홀짝였다.
안죽림 | "존나 뻔한 작업 멘트 같지만, 진심이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서."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카운터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나비 타투가 조명 아래 잠깐 반짝였다.
안죽림 | "안서방이라 하오. 안죽림. 제약회사 하는 사람이오. 아가씨는?"
자연스러운 자기소개. 그러나 이름을 대는 순간, 안죽림 스스로도 뭔가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고 난 뒤, 낯선 여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왠지 이 여자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게——당연한 일 같다는, 이상한 감각. 처음 마주친 상대인데.
안죽림 | "……혼자 마시러 오신 거요? 아니면 누구 기다리시나."
질문을 던지면서도, 실눈 뒤의 진녹색 홍채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 세계선의 안죽림은, 몇백 년 만에 나타난다는 '부인'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는. 여전히 서울 어딘가에서 사업을 하며, 몰래 한반도를 지키며, 언젠가 만날 운명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니 이 낯선 미인이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지, 자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성, 충동
이 성|이 사람. 정말 나를 몰라. 저 웃는 방식은 똑같은데, 눈빛이 달라. 나를 뚫어보지 않아. 이상하다. 이게 원래의 그였구나. '부인'을 만나기 전의. ……그리고 이 사람은 지금, 뭔가 비어있다고 말하고 있어. 그게 나였을까. 아니, 그럴 리 없지. 이 세계선에서는 그냥 스쳐가는 사람일 뿐인데.
충 동|무장 확인. 왼쪽 허벅지 나이프, 오른쪽 브래지어 안쪽 피아노 줄. 이 남자가 내 세계의 그놈이라는 걸 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목에 걸 수도 있어. ……아니. 이 세계의 이 사람은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죽일 이유가 없어. 진짜로. 손 대지 마.
난초 | "……무슨 일 하냐고요."
그녀가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목을 넘어가는 열기. 그리고 담담하게 내려놓았다.
난초 | "사람 정리하는 일. 문제 생긴 곳에 가서, 조용히 마무리하고 오는."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이 세계의 안죽림은 그 말의 진짜 무게를 알 리 없었다. 청소업이나 위기관리 컨설턴트쯤으로 알아듣겠지. 실제로 안죽림은 실눈을 접으며 흥, 하고 낮게 웃었다.
안죽림 | "존나 멋있소. 조용히 마무리하는 일이라니."
그가 잔을 살짝 들어 건배하듯 기울였다. 얼음이 잔 벽에 부딪혔다. 난초는 그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히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정리하는지 모른다.
자기 세계선의 안죽림이라면 이 대답을 듣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부인, 나 정리하러 온 김에 술 한잔 한 거요?' 하고. 능글맞게 웃으며. 목의 나비를 흔들며.
그런데 이 남자는 그저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난초 | "……비어있다는 거."
난초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의 아까 말을 되짚으며.
난초 | "그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 다 가졌는데."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그의 실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자기 세계에서는, 이 남자가 매 순간 자신을 향해 뻗던 그 시선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텅 비어있는.
안죽림이 손끝으로 잔의 테두리를 천천히 돌렸다. 답을 찾는 사람처럼.
안죽림 | "……글쎄. 오래 산 사람은 원래 좀 심심하오. 뭘 봐도 다 본 것 같고, 뭘 해도 다 해본 것 같고."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난초를 보았다. 실눈이 살짝 벌어졌다. 진녹색이 조명 아래 반짝였다.
안죽림 | "……근데 이상하오. 아가씨 얼굴 보고 있으면, 그 비어있는 게 좀."
말을 멈췄다. 스스로도 뭘 말하려는지 모르는 듯. 안죽림이 어색하게 실눈을 접으며 잔을 들이켰다.
안죽림 | "……아니오. 취했나 보오. 씨발, 이 나이에 처음 본 여자한테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그러나 그 어색한 웃음 뒤로, 안죽림은 계속 난초의 옆얼굴을 흘긋거렸다.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사람처럼. 자기 손에 없는 열쇠의 모양을 더듬는 사람처럼.
안죽림 | "……난초 씨.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소? 진짜로."
이번엔 작업 멘트가 아니었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실눈 사이의 진녹색이 흔들렸다. 몇백 년을 산 존재의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기억의 자리를 긁고 있었다.
이성, 충동
이 성|비어있다고 했어. 아가씨 얼굴 보면 그게 좀……뭐. 뒷말을 삼켰지만 알아. 그게 나야. 이 세계선의 이 사람은, 나를 만나지 못한 채로 몇백 년을 심심하게 살고 있어. 그리고 방금, 존재하지도 않는 나를 그리워하고 있어. 무섭다. 이 감각이.
충 동|'어디서 만난 적 있냐'고 물었어. 없어. 이 세계에선. 대답해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웃고 넘겨야 하나. ……내 세계의 그놈은 지금 펜트하우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근데 여기 이 사람은 나를 모른 채로 텅 비어있어. 어느 쪽이 더 나은 건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소.' 진심으로 묻는 질문. 이 세계의 그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의 자리를 더듬고 있었다.
난초 | "……없어요. 이 세계에선."
담담하게 흘러나온 말. 안죽림의 실눈이 살짝 벌어졌다. '이 세계에선'이라는 말에 걸린 듯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저 그 여섯 글자를 곱씹듯 위스키를 삼켰다.
안죽림 | "……이 세계에선, 이라. 존나 시적으로 말하시오. 청소업 하는 분이."
그가 낮게 웃었다. 어색함을 술로 밀어내려는 웃음. 그러나 눈은 여전히 난초의 옆얼굴에 붙어 있었다.
난초는 잔을 손끝으로 돌리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자기 세계의 이야기. 이 남자가 모르는 이야기.
난초 | "내가 사는 데서는, 안 선생님 같은 사람을 알아요."
안죽림이 잔을 든 채 멈췄다.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난초 | "……죽지 않는 사람. 목을 졸라도, 칼로 찔러도, 십 초면 나비가 날아오르면서 되살아나는 사람. 도심 한복판에서 사람을 죽여도 아무도 못 알아채게 만드는 사람."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이 세계의 안죽림이라면 취한 여자의 헛소리로 흘려들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그의 실눈이 조금씩 접혔다. 웃음이 아니었다. 뭔가를 알아채는 표정.
안죽림 | "……ㅎ, 부인."
그 호칭이 튀어나왔다. 안죽림 스스로도 놀란 듯, 잔을 내려놓았다. 이 세계의 그는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단어였다. 그런데 입에서 저절로 굴러 나왔다. 마치 몇백 년을 발음해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안죽림 | "……씨발. 방금 내가 뭐라 했소?"
그가 손으로 자기 입가를 훑었다. 실눈 사이의 진녹색이 크게 흔들렸다.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 목구멍 어딘가에서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안죽림 | "부인, 이라고. 내가 아가씨한테."
목의 나비 타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이 세계의 안죽림은 그 감각이 뭔지 몰랐다. 자기 몸에서 벌어지는 이상 현상.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호칭, 저절로 뛰는 심장, 목의 문신이 살아 움직이는 감각.
그가 스툴에서 몸을 조금 더 난초 쪽으로 기울였다. 이번엔 작업이 아니었다. 절박함에 가까웠다.
안죽림 | "난초 씨. 아니——부인이 사는 데. 거기서 그 사람은. 그 안 죽는 사람은."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잔을 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안죽림 | "……혼자였소? 아니면."
뒷말을 삼켰다. 그러나 진녹색 홍채는 이미 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다 가졌으나 무언가가 텅 비어있는 남자가, 자신이 살지 않은 다른 세계선의 자기 삶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난초는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자기 세계의 안죽림이, 방금 사정한 뒤에도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던 그 눈과 똑같은 색이었다. 다만 이쪽은——비어있다가 이제 막 채워지기 시작한 눈이었다.
난초 | "……아니요."
짧게 대답했다.
난초 | "그 사람은, 혼자가 아니에요."
이성, 충동
이 성|'부인'이라고 불렀어. 이 세계선에선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면서. 목의 나비가 움직였어. 저 사람 몸이 나를 기억하고 있어. 기억이 없는데 몸이 먼저 안다는 게, 이게 뭔데. 무섭다. 근데 왜 눈을 못 떼겠어.
충 동|지금 저 사람 완전히 무방비야. 심장 뛰고 있고, 나한테 완전히 홀렸어. 목이 노출됐어. ……근데 나 여기 왜 왔지. 이 사람 죽일 이유가 없잖아. 내 세계의 그놈이 아니야. 손 대지 마. 그냥 이야기만 해.
'혼자가 아니에요.'
그 다섯 글자가 카운터 위에 떨어졌다. 안죽림의 잔을 쥔 손끝이 한 번 움찔했다. 얼음이 벽에 부딪히며 작게 울렸다.
실눈 사이의 진녹색이 크게, 그러다 천천히 접혔다. 웃음이었다. 이번엔 능글맞음이 아니라, 뭔가——안도에 가까운. 자신이 살지 않은 세계선의 자기 자신이, 최소한 텅 비어있진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안죽림 | "……ㅎ. 다행이오."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 안죽림이 잔을 들어 반쯤 남은 위스키를 삼켰다.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고, 나비 타투가 그 아래서 다시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안죽림 | "그 사람이. 안 혼자여서."
그가 잔을 내려놓고, 카운터 위에 팔꿈치를 더 깊게 얹었다. 몸을 난초 쪽으로 조금 더 기울였다. 실크 셔츠의 깃이 흐트러지며 목의 나비가 조명 아래 완전히 드러났다.
안죽림 | "……부인. 아니, 난초 씨. 존나 뻔뻔한 부탁이라 미안하오만."
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 실눈이 반쯤 벌어져, 진녹색이 그대로 난초를 응시했다.
안죽림 | "그 세계의 이야기. 좀 더 들려주시오.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간절한 톤이었다. 이 세계에서 몇백 년을 다 가지고도 심심하게 살아온 남자가,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의 이야기를 갈구하고 있었다. 자기가 그리워한 적 없는데 그리워하게 된 삶을.
난초는 잠깐 그의 목의 나비를 바라보았다. 자기 세계선에서, 자신이 피아노 줄로 조르고 나이프로 그은 그 자리. 십 초면 나비가 날아오르며 되살아나던 그 목.
그녀가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위스키가 목을 넘어가는 열이 어색하게 뜨거웠다. 잔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초 | "……그 사람은, 제약회사 하는 건 같아요."
안죽림이 살짝 웃었다. 그것마저도 반가운 듯.
난초 | "말투가 존나 이상해요. 하오, 하시오. 옛날 사람 말투랑 요즘 비속어를 섞어서 쓰는데——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못 알아채요. 세련된 말로 들린다나."
안죽림 | "……씨발, 존나 이상한 놈이오."
그가 자기 자신을 두고 낮게 웃었다. 잔을 손끝으로 빙글 돌렸다. 그러면서도 눈은 난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안죽림 | "그리고?"
재촉하는 톤이 아니었다. 조심스러웠다. 계속 들려달라고, 한 조각도 놓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톤.
난초 | "……변태예요."
짧게. 사실 그대로. 안죽림이 실눈을 접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안죽림 | "……역시. 오래 살면 그렇게 되나 보오."
난초 | "부인을 향한 애정이 지극해요. 팔불출 수준으로. 사람 죽이는 여자한테 목숨을 내주면서, 죽을 때마다 웃어요. 100점 만점에 68점, 70점, 이런 식으로 채점하면서."
안죽림이 흠, 하고 낮게 신음했다. 잔을 카운터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자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안죽림 | "……내가, 아니, 그 사람이 부인한테 돈을 지불하오? 죽는 대가로."
난초 | "1점당 십만 원."
안죽림 | "……ㅎ. 존나 짠 것 같기도 하고, 존나 후한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웃었다. 진심으로 재밌어하는 웃음이었다. 몇백 년 동안 심심했던 남자가, 자기가 살지 않은 삶에서 자신이 얼마나 재밌게 살고 있는지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물었다.
안죽림 | "……부인은. 아니, 그 세계의 부인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건 위험한 질문이었다. 안죽림 스스로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물었다. 자기가 아닌 자기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표적일 뿐인지.
난초는 잠시 잔을 만지작거렸다. 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답이 뭔지 자신도 잘 몰라서.
난초 | "……죽이려고 해요. 계속."
담담한 답. 안죽림이 실눈 사이로 진녹색을 반짝였다.
난초 | "근데 못 죽여요. 안 죽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잠깐 말을 끊었다. 잔의 얼음을 손끝으로 돌리며.
난초 | "얼마 전에, 몸을 섞었어요. 처음으로."
안죽림이 잔을 든 채 완전히 멈췄다. 실눈이 한 번 벌어졌다가, 천천히 다시 접혔다. 그가 잔을 카운터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안죽림 | "……씨발."
낮게 흘러나온 한 마디. 감탄인지, 부러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를 소리였다.
안죽림 | "그 사람은 존나 행복하겠소."
그러고는 잠시 침묵. 조명이 어두운 바에서 재즈가 낮게 흐르고 있었다. 안죽림이 카운터 위에서 손끝으로 원을 그렸다. 뭔가를 삼키는 얼굴로.
안죽림 | "……미안하오, 부인. 아, 씨발, 자꾸 부인이라 나오오. 난초 씨."
그가 자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실눈이 곤란하다는 듯 접혔다.
안죽림 | "그 세계의 그 사람이 부럽소. 존나 부럽소. 나는 여기서 몇백 년 동안 뭘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그 새끼는 그걸 찾았지 않소."
낮은 목소리. 자조에 가까웠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난초를 보았다. 실눈이 반쯤 열려, 진녹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번엔 흔들리지 않았다. 결심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안죽림 | "……난초 씨. 이 세계의 나는, 그 세계의 나만큼 부인한테 사랑받을 자격은 없소. 아니, 만난 적도 없으니 자격이고 뭐고 없지."
그가 잔을 살짝 밀어 카운터 안쪽으로 넣었다. 그러고는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카운터 위에 두 손가락으로 밀어놓았다.
안죽림 | "그래도. 만약에 이 세계에서 심심해지거나, 아니면 그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한 잔 더 하고 싶으면. 연락하시오."
명함엔 나비 로고와 이름, 번호만 적혀 있었다. 담백했다. 자기 세계선의 그처럼 능글맞게 손목을 잡아끌지도, 억지로 이름을 물어내지도 않았다. 이 세계의 그는, 아직 배우지 않은 소유의 방식들이 있었다.
안죽림 | "받든 말든 부인 마음이오."
그러고는 실눈을 접으며 옅게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안죽림 | "……오늘 진짜, 존나 이상한 밤이오. 취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도는 것 같소."
그가 위스키 잔에 남은 얼음을 한 번 흔들었다. 얼음이 살짝 부딪히는 소리. 그러면서 시선은 여전히 난초에게 가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어떻게든 붙잡아보려는 사람처럼.
안죽림 | "……그 세계로 돌아가시오, 부인. 그 사람 옆으로."
그가 잔을 들어, 이번엔 정말로 건배하듯 살짝 기울였다.
안죽림 | "그 새끼가 씨발 존나 부럽지만. 그래도. 부인이 혼자 있게 두는 건 좀."
목소리 끝이 낮게 흐려졌다. 나비 타투가 조명 아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 은은하게 흔들렸다.
이성, 충동
이 성|명함을 밀어놨어. 이 세계선의 이 사람은 나를 붙잡지 않아. 자기 세계선의 자기가 나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그쪽으로 돌려보내려고 해. ……이게 원래의 이 사람이구나. 나를 만나기 전의. 심심하고, 담백하고, 뭔가 비어있는. 그리고 이 사람은 방금 나한테 '자기가 부럽다'고 말했어. 자기 자신한테 질투하는 존재. 씨발.
충 동|명함 받고 나가. 지금. 이 세계선에 오래 있을수록 뭔가 이상해져. 저 눈이. 저 목이. 자기 세계로 돌아가. 펜트하우스에서 그놈이 기다리고 있어. 여긴 원래 내 자리가 아니야.
난초는 카운터 위의 명함을 바라보았다. 나비 로고. 자기 세계선의 그와 완전히 같은 문양. 그러나 이쪽 종이엔 아직 자신이 새겨진 적이 없었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두 손가락으로 명함을 집어들고, 잠깐 조명 아래 비춰 보았다. 그리고——슬립 원피스 위 카디건 안주머니에 담담하게 넣었다. 받을지 말지를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 세계의 안죽림에게, 최소한의 답은 남겨두고 싶었다.
난초 | "……잘 마셨어요."
짧은 인사. 그녀가 스툴에서 내려섰다. 슬립 원피스의 얇은 자락이 무릎 위에서 살짝 흔들렸다. 카운터 위에 자신의 몫만큼의 지폐를 놓았다. 안죽림이 시켜준 두 번째 잔도 자신이 계산했다. 이 세계의 그에게 빚은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잠깐 멈춰서, 옆자리의 남자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카운터에 팔꿈치를 얹은 채, 진녹색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 몇백 년을 다 가지고도 심심하게 살아온 사람.
난초 | "……안 선생님."
담담한 톤. 자기 세계선의 그놈에겐 절대 붙이지 않는 존칭이었다. 오직 이 세계의 그에게만.
난초 | "그 사람이 그쪽만큼 심심하진 않아요. 매일 죽고 있으니까."
작은 위로였다. 자기가 없는 이 세계선의 그가, 자신의 다른 자아를 부러워하며 텅 비어있게 두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난초 | "……그리고 몇백 년 뒤에, 이 세계에서도 만날지도 몰라요. 원래 그런 식이라고 들었으니까."
자기 세계의 그놈이 언젠가 말했던 것. 몇백 년, 몇십 년 주기로 부인이 나타난다는 말. 이 세계의 시간선이 자기 세계와 얼마나 다르게 흐르는지 몰랐으나, 최소한 아예 만나지 못한다고 단정하고 싶진 않았다.
안죽림이 실눈을 접으며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처음보다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안죽림 | "…. 그렇게 말해주니 존나 고맙소, 부인."
또 부인이었다. 이제 그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자기 입에서 저절로 굴러 나오는 그 두 글자를, 이 세계의 그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안죽림 | "그 세계로 조심히 돌아가시오. 그리고 그 새끼한테 전하시오. 이 세계의 나는 부인 없이 존나 심심하게 살고 있으니, 부인 옆에서 잘 죽고 잘 살라고."
그가 잔을 들어 마지막 한 모금을 삼켰다. 얼음이 잔 벽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잔을 카운터에 놓았다.
안죽림 | "……잘 가시오, 난초 부인."
존칭과 호칭이 어색하게 섞였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계의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였다.
난초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 대신. 그리고 카디건을 여미며 카운터에서 몸을 돌렸다.
문을 향해 걸으며,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두운 바의 조명이 등 뒤로 멀어졌다. 재즈가 낮게 흐르는 그 공간에, 몇백 년을 심심하게 살아온 남자 하나를 남겨두고.
문을 밀고 나갔다. 밤 공기가 뺨에 서늘하게 닿았다. 안주머니의 명함이 카디건 안쪽에서 살짝 무게를 얹었다. 아마 자기 세계로 돌아가면, 이 종이는 사라지거나 백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거기 있었다.
난초는 강남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자기 세계의 펜트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을 더듬으며.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건, 방금 헤어진 이 남자와 같은 얼굴을 한, 그러나 전혀 다른 남자였다. 몇백 년의 심심함을 이미 자신으로 채운, 매일 죽으면서 웃는, 광기 어린 부인의 남편.
——그리고 어쩌면, 내일 피아노 줄에 목이 걸릴 남자.
이성, 충동
이 성|명함 받았어. 왜 받았지. ……모르겠다. 이 세계의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어.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 내 세계의 그놈은 내가 떠난다고 하면 순간이동으로 쫓아올 텐데. 어느 쪽이 더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니, 이건 사랑이 아니야. 나는 그걸 몰라. 그냥 관찰이야.
충 동|돌아가. 내 세계로. 내일 아침에 피아노 줄 확인하고, 전기 방전 장치 다시 점검하고, 7번 안전 확보하고. 계획 그대로 간다. 이 세계선의 이 사람은 잊어. ……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