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7월 25일, 목요일 | 09:14 | 강남역 11번 출구 | ❎ 】
난초가 앞장서 걸었다. 검은 정장 재킷, 무릎 아래 검은 치마, 굽 낮은 검은 구두. 어깨에 검은 백팩 하나. 안죽림이 그 백팩을 보고 물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안죽림 | "어디로 가오? 관람차는 오후 아니오?"
난초 | "다 왔어."
그 말을 들은 시각, 09시 14분. 누적 이동 거리 0m.
안죽림이 실눈을 접었다. 순순히 뒤를 따랐다. 목의 나비 문신이 느긋하게 날개를 폈다. 신뢰도 100%.
【 09:41 | 논현역 부근 | 누적 1.9km 】
보도블록을 스물일곱 분간 밟았다. 안죽림은 손을 뻗어 난초의 손을 잡았다. 잡혔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얼굴이었다.
안죽림 | "존나 산책이오? 좋소. 이런 거 몇백 년 만이오."
난초 | "다 왔어."
신뢰도 100%. 변동 없음.
【 10:58 | 한강대교 남단 | 누적 7.4km 】
난초가 다리 위로 올라섰다. 강풍에 치마가 눌렸다. 안죽림이 재킷을 벗어 난초의 어깨에 걸쳤다. 난초가 벗어서 되돌려줬다. 안죽림이 다시 걸쳤다. 세 번 반복됐다.
안죽림 | "……강을 건너오?"
난초 | "다 왔어."
안죽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 중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안죽림 | "여기서 밀면 존나 재밌겠소. 오늘 아직 정산 안 했잖소. 밀어보시오."
난초 | "안 밀어. 다 왔어."
신뢰도 98%. 미세한 하락. 사유: 다리 길이 대비 목적지 부재.
【 13:20 | 노량진 수산시장 앞 】
난초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광어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안죽림의 실눈이 벌어졌다.
안죽림 | "……여기요? 여기가 목적지요?"
난초 | "아니. 배고파서."
난초가 회를 초장에 찍어 먹었다. 안죽림은 젓가락을 들지 않고 그 모습을 30분간 관찰했다. 계산할 때 난초가 카드를 꺼냈다. 안죽림의 손이 재킷으로 갔다가 멈췄다. 어제 배운 규칙 때문이었다.
13:58, 다시 일어섰다.
난초 | "다 왔어."
누적 12.1km. 신뢰도 91%.
【 17:34 | 안양천 자전거도로 | 누적 24.8km 】
해가 기울었다. 안죽림의 구두 뒤축이 벗겨져 안창이 드러났다. 아무 통증도 느끼지 않았으나, 벗겨진 구두를 손에 들고 맨발로 걸었다. 발바닥이 아스팔트에 닿을 때마다 즉시 재생됐다.
안죽림 | "난초."
난초 | "다 왔어."
안죽림 | "……내가 아직 아무것도 안 물었소."
신뢰도 74%.
【 21:12 | 광명 시내 | 누적 33.6km 】
난초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두 개와 이온음료를 샀다. 안죽림에게 하나를 건넸다. 안죽림이 그것을 받아 들고, 비닐을 뜯지 않은 채 손에 쥐었다.
안죽림 | "존나 물어보겠소. 목적지가 어디오."
난초 | "다 왔어."
안죽림 | "……그게 아니오. 지명. 지명을 말해주시오."
난초 | "근처."
안죽림이 삼각김밥을 이마에 붙였다. 그리고 뗐다. 목의 나비 문신이 날개를 접었다.
신뢰도 58%.
【 2024년 7월 26일, 금요일 | 01:47 | 시흥 어느 공원 】
난초가 백팩을 열었다. 침낭 두 개가 나왔다. 벤치 옆 잔디에 펼쳤다. 안죽림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안죽림 | "존나 노숙이오?"
난초 | "잠깐 쉬는 거야."
안죽림 | "난 잠을 안 자오. 몇천 년 동안 안 잤소."
난초 | "그럼 앉아 있어."
난초가 침낭에 들어가 지퍼를 목까지 올렸다. 눈을 감았다.
안죽림은 남은 침낭 위에 정좌했다. 밤새 난초의 얼굴을 보았다. 새벽 세 시경, 모기가 난초의 뺨에 앉으려 하자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다섯 번.
신뢰도 62%. 소폭 회복. 사유: 자는 얼굴.
【 09:02 | 시흥 출발 | 누적 33.6km 】
난초 | "다 왔어."
안죽림 | "……."
걸었다.
【 15:30 | 수원 화성 성벽 | 누적 51.2km 】
난초가 성벽 위를 걸었다. 관광객들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났다. 안죽림이 성벽 아래 풍경을 잠시 보았다.
안죽림 | "존나 예쁘구려."
난초 | "다 왔어."
안죽림 | "……그 말 이백열두 번째요."
난초 | "세고 있었어?"
안죽림 | "몇천 년 살면 셀 게 그거밖에 없소."
신뢰도 41%.
【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 22:15 | 평택 국도변 | 누적 88.7km 】
비가 왔다. 난초가 백팩에서 우산을 꺼냈다. 한 개였다. 자기 머리 위에 펼쳤다. 안죽림이 그 옆에 서서 비를 그대로 맞았다.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물이 목의 나비 문신 위를 타고 흘렀다.
안죽림 | "난초."
난초 | "다 왔어."
안죽림 | "……우산 한 개요."
난초 | "다 왔어."
안죽림이 손을 뻗어 우산대를 잡았다. 난초 쪽으로 기울였다. 자기는 더 젖었다.
신뢰도 33%. 애정 지표 별도 항목: 상한 초과.
【 2024년 7월 29일, 월요일 | 11:40 | 천안 삼거리 | 누적 141.3km 】
난초가 노점에서 호두과자를 샀다. 열두 개. 안죽림에게 여섯 개를 나눠줬다.
안죽림 | "존나 묻겠소. 마지막으로."
난초 | "응."
안죽림 | "목적지가 있소, 없소."
난초 | "있어."
안죽림 | "몇 킬로 남았소."
난초 | "다 왔어."
안죽림이 호두과자 여섯 개를 한 번에 입에 넣었다. 씹지 않고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하늘로 젖혔다.
신뢰도 21%.
【 2024년 7월 31일, 수요일 | 06:55 | 대전 시내 진입 | 누적 187.9km 】
난초의 구두 굽이 부러졌다. 백팩에서 여분 운동화를 꺼내 갈아 신었다. 안죽림이 그 백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안죽림 | "그 안에 뭐가 더 들었소."
난초 | "필요한 거."
안죽림 | "구두 여분이 있다는 건 존나 길어질 걸 알았다는 뜻이오."
난초 | "……다 왔어."
그 순간이었다. 안죽림이 멈춰 섰다. 도로 한복판. 출근길 인파가 두 사람 옆을 스쳐 지났으나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았다.
안죽림 | "이백일흔여덟 번."
실눈이 벌어졌다. 진녹색 눈동자가 완전히 드러났다. 목의 나비 문신이 날개를 활짝 펴고 미친 듯이 떨었다.
안죽림 | "난초, 이거 존나 실험이오?"
난초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안죽림 | "'다 왔다'는 말로 사람 얼마나 걷게 하는지, 그거 재고 있었소?"
난초가 대답하지 않았다. 안죽림이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손을 내렸다. 웃고 있었다. 실눈이 완전히 접힌 채, 어깨가 흔들렸다.
안죽림 | "존나 미쳤소. 진짜 존나 미쳤소."
그러면서 난초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팔을 벌려 등에 손을 대고, 무릎 아래를 받쳐 한 번에 들어올렸다.
안죽림 | "여기까지요. 삼백 킬로는 안 되오."
안죽림은 그 자리에서 순간이동하지 않았다. 난초를 안은 채 걸어서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갔다. 벤치에 앉히고, 백팩을 벗겨 옆에 두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운동화를 벗기고 발바닥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안죽림 | "존나 물집이 여섯 개요."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안죽림 | "그래서, 결론이 뭐요. 몇 킬로였소."
난초 | "……백팔십칠."
안죽림 | "그럼 논문 제목은 '초월자는 백팔십칠 킬로까지 걷는다'요?"
난초가 고개를 돌렸다. 안죽림이 그 발등에 이마를 얹었다.
안죽림 | "존나 틀렸소. 정정하시오."
목소리가 낮아졌다.
안죽림 | "끝은 없었소. 난초가 '다 왔다'고 하는 동안은 존나 계속이오. 부산까지도, 지구 한 바퀴도."
후일담. 그날 저녁 두 사람은 KTX로 서울에 돌아왔다. 표는 난초가 결제했다. 안죽림은 좌석에서 난초의 발을 무릎에 올려놓고 대전에서 광명까지 물집을 세었다. 관람차 데이트는 8일 밀렸고, 그날의 암살 시도는 무산되었다.
이후 안죽림의 폰 메모 앱에는 새 항목이 추가되었다. 「조항 4-3. 목적지는 킬로미터로 명시할 것. 위반 시 벌칙: 업어주기.」
난초는 그 조항을 스무 번 더 위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