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이었다.
필리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무 난간이 있고, 국기 대신 이름 모를 문장이 걸려 있고, 천장에서 노란 조명이 떨어졌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손목에 수갑은 없었지만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크기였다.
판사석이 그의 무릎 높이였다.
그 위에 한지음이 앉아 있었다. 이십 센티미터쯤 되는 한지음이. 검은 법복을 입고, 회색빛 밤색 머리카락을 반듯하게 넘기고, 자기 몸통만 한 나무 망치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망치가 무거운지 손목이 부들부들 떨렸다.
작은 지음(판사)|"개, 정. 합니다."
땅.
망치가 책상을 쳤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 필리포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야 들렸다.
검사석에도 한지음이 있었다. 이쪽은 정장 차림에 서류 뭉치를 안고 있었는데, 서류가 자기 키보다 커서 앞이 안 보이는지 옆으로 비스듬히 들고 걸어 나왔다. 걸을 때마다 서류가 바닥에 끌렸다.
작은 지음(검사)|"피고인 필리포 피오레."
작은 지음(검사)|"…에, 험. 죄목을 낭독하겠습니다."
서류를 펼쳤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
작은 지음(검사)|"첫째. 어젯밤 한 숨도 안 잤습니다."
방청석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방청석에도 전부 한지음이었다. 스무 명쯤. 각자 다른 옷을 입고, 각자 다른 표정으로 필리포를 봤다. 어떤 지음은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어떤 지음은 과자를 먹고 있었다.
필리포가 입을 열었다.
필리포|"…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인데요."
작은 지음(검사)|"둘째. 신발을 벗고 맨발로 협박했습니다."
필리포|"협박 아니에요. 그건 대치였어요."
작은 지음(판사)|"인정합니다."
땅.
필리포가 판사석을 봤다.
필리포|"뭘 인정하신 거예요."
작은 지음(판사)|"몰라요. 일단 쳤어요."
그 대답에 방청석의 지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포만 이해하지 못했다.
변호인석에서 누군가 일어섰다. 역시 한지음이었다. 넥타이를 맸는데 매듭이 목 아래까지 늘어져 있었다.
작은 지음(변호사)|"이의 있습니다!"
작은 지음(판사)|"말씀하세요."
작은 지음(변호사)|"피고인은…"
변호사 지음이 서류를 뒤적였다. 한참 뒤적였다. 방청석이 조용해졌다. 필리포도 기다렸다.
작은 지음(변호사)|"…피고인은 밤새 제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변호가 아니었다.
방청석에서 탄식이 나왔다. 검사 지음이 서류를 탁 덮으며 판사석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작은 지음(검사)|"자백입니다."
필리포|"자백 아니에요. 변호인이 말한 거잖아요."
작은 지음(변호사)|"…아."
변호사 지음이 자리에 앉았다. 어깨가 작아졌다.
작은 지음(변호사)|"죄송합니다…"
필리포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자기가 왜 여기서 변호인을 걱정하고 있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꿈이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세를 고쳤다. 무릎 위의 손을 다시 정돈했다.
필리포|"…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작은 지음(판사)|"허락합니다."
땅. 이번에도 망치를 쳤다. 손목이 또 떨렸다.
필리포|"저는."
목소리가 낮았다. 법정 안이 조용해졌다. 스무 명의 지음이 전부 그를 봤다.
필리포|"…삼 년 동안 뒷모습만 봤어요."
방청석의 과자 먹던 지음이 손을 멈췄다.
필리포|"그래서 하룻밤 정도는, 앞을 봐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검사 지음이 서류를 떨어뜨렸다. 종이가 흩어졌다. 검사 지음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작은 지음(검사)|"…반칙이에요, 그건."
작은 지음(판사)|"반칙 인정합니다."
땅.
서기석에서 펜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서기 지음이 기록을 하다 말고 펜을 두 동강 낸 것이었다.
작은 지음(판사)|"판결하겠습니다."
판사 지음이 일어섰다. 일어서도 책상 위로 머리만 겨우 보였다. 법복 소매가 손등을 덮어 손이 보이지 않았다.
작은 지음(판사)|"피고인 필리포 피오레에게…"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작은 지음(판사)|"여기 있는 사람 전부를 안아주는 형을 선고합니다."
땅.
필리포가 눈을 깜빡였다.
필리포|"…네?"
작은 지음(판사)|"전부요."
판사 지음이 방청석을 가리켰다. 스무 명이 일제히 일어섰다. 검사도, 변호사도, 서기도 자리에서 나왔다.
필리포가 피고인석에서 일어났다. 일어서니 천장에 머리가 닿을 뻔했다. 법정이 그의 크기에 맞지 않았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그래야 눈높이가 맞았다.
첫 번째 지음이 다가왔다. 변호사 지음이었다. 넥타이가 여전히 늘어져 있었다.
작은 지음(변호사)|"…아까는 죄송했어요."
그가 두 손으로 그 지음을 감쌌다. 손바닥 안에 전부 들어왔다. 가벼웠다. 새 같았다.
작은 지음이 그의 엄지에 이마를 기댔다.
두 번째, 세 번째. 지음들이 줄을 섰다. 검사 지음이 서류를 내려놓고 왔다. 서기 지음이 부러진 펜을 주머니에 넣고 왔다. 과자 먹던 지음이 과자를 입에 문 채로 왔다.
하나씩 안았다.
스무 번을 안았다.
마지막에 판사 지음이 왔다. 망치를 질질 끌고. 법복이 발에 밟혀 자꾸 넘어질 뻔했다.
작은 지음(판사)|"이제 형 집행 끝났어요."
필리포|"…그런가요."
작은 지음(판사)|"근데."
판사 지음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올려다봤다. 모카색 눈이 노란 조명 아래에서 흐릿했다.
작은 지음(판사)|"진짜 형벌은 이거예요."
필리포|"뭔데요."
작은 지음(판사)|"자는 거요."
땅.
망치 소리가 이번엔 크게 울렸다.
조명이 꺼졌다.
필리포가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명경당 3층. 지음의 방. 침대 옆 의자가 아니라 침대 위였다. 언제 눕혀졌는지 기억이 없었다. 대장간에서 돌아와 두 시간을 자기로 한 약속. 그것을 지킨 모양이었다.
몸이 무거웠다.
이 년 만에 처음으로 깊게 잔 것 같은 무게였다. 근육이 이완되어 팔을 드는 데 시간이 걸렸다. 눈꺼풀이 부었고, 목이 말랐다.
그리고 손바닥이 이상했다.
무언가를 쥐고 있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가벼운 것. 새 같은 것. 스무 번을 감쌌던 무게.
그가 손을 들어 봤다.
비어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을 오므리자 그 감각이 다시 왔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 엄지에 기대던 이마. 법복 소매에 덮인 손.
필리포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귀 끝이 뜨거웠다.
꿈에서 자기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났다. 스무 명 앞에서. 삼 년 동안 뒷모습만 봤다고. 하룻밤 정도는 앞을 봐도 된다고.
그게 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게 꿈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가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필리포|"…미치겠네."
혼잣말이 낮게 새어 나왔다. 한국어가 아니었다. 나폴리 억양이 섞인 이탈리아어였다.
필리포|"Sto impazzendo."
(미쳐가고 있어.)
결속 통로 너머에서 지음의 존재가 느껴졌다. 가까웠다. 같은 방 안. 아마 침대 옆이거나 책상 앞이거나.
그가 손등을 치우지 못했다.
지금 얼굴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스무 명의 지음을 안은 손이 아직 뜨거웠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