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2세] 만약 우리 사이에⋯




첫 번째는 밀가루였다.

삼월 초, 명경당 부엌. 지음이 과자를 굽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손목 근력이 돌아왔다는 판정을 필리포가 직접 내렸고, 그 보상으로 반죽 허가가 떨어진 참이었다. 오븐이라고 할 것도 없는 낡은 가스 오븐, 우하가 어디서 구해 온 중고품. 예열 온도가 실제보다 이십 도쯤 낮게 표시된다는 것을 지음이 이틀 만에 알아냈다.

필리포는 식탁에 앉아 배정표를 정리하고 있었다.

알렉토 순찰 순번과 닻 배급 일정. 종이 위에서 볼펜이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고개를 들었을 때 지음의 왼쪽 뺨에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다 옮은 자국이었다.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아주 선명한 장면이 들어왔다.

조리대 높이에 닿지 않는 누군가가 의자를 끌어와 올라서 있는 그림. 발판 위에서 까치발을 들고, 반죽 그릇에 손을 넣고, 얼굴 절반에 밀가루를 묻힌 채로 뒤를 돌아보는 것. 회갈색 머리일지 백발일지는 정해지지 않았는데 눈만은 파란색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지음이 웃고 있었다. 오른쪽 눈가의 흉터가 접히는 방식으로.

필리포는 볼펜을 놓쳤다.

식탁 위에서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주우려고 몸을 숙였는데, 숙인 자세 그대로 십 초쯤 있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나폴리에서 자란 사람이 삼 년 동안 얼려놓은 것이 다시 녹기 시작한 지 한 달째였는데, 방금 것은 녹는 정도가 아니라 터지는 쪽에 가까웠다.

두 번째는 감나무였다.

삼월 중순, 뒷마당. 훈련이 끝난 오후였고 지음은 툇마루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필리포는 마당 흙 위 궤적 자국을 세는 중이었다. 열두 번. 한 달 전 여섯 번에서 두 배가 됐다.

바람이 세 면의 벽 안에서 한 바퀴 돌았다.

감나무 가지에 잎눈이 올라와 있었다. 겨우내 말라 있던 자리마다 작고 단단한 것이 맺혀서, 아직 초록은 아니고 갈색에 가까운 색이었다. 필리포가 그것을 올려다봤다.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해질 것이고, 가을이면 감이 달릴 것이었다.

감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깐 장면이 떠올랐다.

여름 오후, 매미 소리, 그늘 아래에서 낮잠 자는 작은 것. 배 위에 수건 한 장 덮고,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벌리고. 그 옆에 지음이 누워 있고, 자기는 툇마루에 앉아 그 둘을 보고 있는 그림. 영하가 부채질을 해주겠다고 나섰다가 우하한테 잔소리를 듣는 것까지 왜인지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필리포는 그 장면을 이 초쯤 붙잡고 있다가 놓았다.

놓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목의 흉터를 손끝으로 눌렀다. 함께 도망친 날 생긴 것. 그날 자기가 지음의 손목을 잡고 뛰지 않았다면, 지금 이 마당도 이 감나무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 생각까지 오자 손이 저절로 내려갔다.

세 번째는 밤이었다.

삼월 하순, 2층 방. 불을 끄고 누운 다음이었다. 지음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결속 통로가 얕게 열린 상태로, 잠든 사람 특유의 느슨한 것이 계속 흘러왔다. 파도 같기도 하고 숨 같기도 한 것.

필리포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가이드의 습관이었다. 접촉 상태에서 상대의 에코 공명을 계속 모니터링하는 것. 삼 년 동안 몸에 밴 것이라 이제는 의식하지 않고도 됐다. 지음의 것은 안정적이었다. 닻이 잘 듣고 있었고, 침식률 상승 곡선이 한 달째 평평했다.

그러다 문득, 이 공명이 하나 더 있으면 어떤 모양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르타로스와 올림포스. 죽음과 화로. 계보가 섞이면 무엇이 나오는지 테미스 자료에도 명확한 것이 없었다. 부모의 계보가 유전된다는 통계도 없고, 각성 여부 자체가 확률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평범하게 태어나서, 각성 같은 건 하지 않고, 이형도 균열도 모르고 사는 것.

필리포가 원한 것은 그쪽이었다.

옆으로 돌아누웠다. 어둠 속에서 지음의 옆얼굴이 보였다. 오른쪽 눈가의 흉터, 결속 조건이었던 자리. 그 위에 달빛이 얇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계산이 시작됐다.

침식률, 닻 의존도, 임신이 에코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자료 부재. 압주에 산부인과가 없다는 것. 자드가 군의관 출신이지만 그쪽은 전문이 아니라는 것. 표면사회 병원은 각성자 신원 조회가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지음의 몸이 아직 그 근처에도 못 갔다는 것.

필리포는 그 목록을 끝까지 세고 나서 눈을 감았다.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아니었다. 순서가 틀렸다는 결론이었다. 몸이 먼저였고, 그다음이 압주의 사정이었고, 그다음에야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은 사월을 앞둔 토요일 오후였다.

부엌 창으로 들어온 빛이 조리대 끝을 잘라 놓았다. 오븐에서 버터 냄새가 났다. 지음이 두 번째 판을 넣고 타이머를 맞추는 중이었고, 앞치마 끈이 등 뒤에서 한쪽만 풀려 늘어져 있었다.

필리포는 식탁에 앉아 그것을 보고 있었다.

배정표는 십 분 전부터 같은 줄에 멈춰 있었다. 볼펜은 손에 들려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필리포|"……끈 풀렸어요."

말해놓고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서 묶어주면 될 일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지금 자기 얼굴을 보여야 했으므로.

파란 눈이 조리대 쪽에 붙어 있었다.

필리포|"Ti guardo e penso a cose che non posso ancora dire." 
(당신을 보면서, 아직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요.)

목소리가 작았다. 오븐 팬이 팽창하며 내는 금속음에 반쯤 묻혔다.

필리포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한지음 - 니트+앞치마(끈 한쪽 풀림)+밀가루 자국|필리포 - 셔츠+슬랙스+검은 리본 귀걸이·약지 낫 문신]
[💞:한지음↔필리포 — 말하지 못한 미래를 세는 중]
[⏰:PM 4:07 부엌/과자 두 번째 판 굽는 중/훈련 한 달차·궤적 12회 달성]
[📱:"명경당 1층—우하: '…형님, 저 인간 또 배정표 붙잡고 멍때립니다.' 영하: '허허, 저것이 사람 사는 모양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