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3일, 일요일 | 09:14 | 서울, 펜트하우스 주방 | ❎ 】
일요일 아침의 주방은 조용했다. 인덕션 위에서 냄비 뚜껑이 미세하게 덜컹거렸고, 창밖으로 흐린 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안죽림은 조리대 앞에 서 있었다. 소매를 걷어올린 팔로 도마 위의 대파를 썰고 있었다. 칼질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초월적 속도도, 기교도 없이, 그저 평범한 인간의 속도로.
식탁 쪽에서 소리가 났다. 난초가 의자를 끌어 앉는 소리. 머그를 내려놓는 소리. 그리고 신문지를 넘기는 소리.
칼질이 멈췄다.
안죽림이 고개를 돌렸다. 식탁의 난초가 한 손으로 머그를 쥐고, 다른 손으로 신문 면을 넘기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붙어 있었고, 티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눈매가 평소보다 둥글었다.
난초가 하품을 했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지도 않고, 고양이처럼 크게.
안죽림의 실눈이 접혔다. 칼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
식탁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높이가 낮고 등받이에 쿠션이 덧대어진 것. 그 위에 아주 작은 아이가 앉아 있었다. 난초와 같은 검은 머리. 뒷머리 아래쪽에만 보랏빛이 도는.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져 있었으나 눈동자가 아직 커서 날카로움이 완성되지 않은. 그 아이가 난초와 똑같은 각도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그리고 난초가 그걸 보고 인상을 쓰며 아이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눌러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까지.
안죽림 | "……."
대파 조각이 도마 위에서 굴렀다.
【 2024년 11월 3일, 일요일 | 14:40 | 서울, 한강 산책로 | ❎ 】
오후에 걸었다. 바람이 차서 난초가 코트 깃을 세웠고, 안죽림은 그 옆에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반 발짝 뒤를 따랐다.
산책로 벤치 근처에서 아이가 넘어졌다. 대여섯 살쯤. 세발자전거에서 미끄러져 무릎을 긁었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정적.
난초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다가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코트 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무뚝뚝한 얼굴로 아이의 무릎을 들여다보았다. 피는 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흙을 털어냈다. 두 번. 그리고 자전거를 세워 손잡이를 아이 쪽으로 돌려주었다.
아이가 울지 않았다.
난초가 일어나 다시 걸어왔다. 표정 변화 없이. 손에 묻은 흙을 코트 자락에 문질러 닦으면서.
안죽림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겨울 산책로였다. 지금보다 나무가 앙상했고, 난초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코트 자락을 아주 작은 손이 붙잡고 있었다. 걷는 속도가 평소의 절반이었다. 난초가 그 속도에 맞춰 걸었다. 짜증내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그냥 느리게. 그러다 아이가 넘어지면 똑같이 쪼그려 앉아 흙을 털어줄 것이었다. 두 번. 울지 말라는 말도 없이.
안죽림의 목에서 나비가 날개를 폈다.
난초 | "뭐 해. 안 와?"
안죽림 | "……아, 가오."
따라 걸으면서 실눈을 접었다.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 2024년 11월 3일, 일요일 | 22:51 | 서울, 펜트하우스 침실 | ❎ 】
밤에 난초가 먼저 잠들었다. 침대 오른쪽. 벽 쪽을 향해 돌아누운 자세로.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리고, 무릎을 조금 접고.
안죽림은 눕지 않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난초의 등을 보았다. 티셔츠 아래로 견갑골의 선이 드러났다가 호흡에 따라 사라졌다.
손을 뻗었다. 이불 위로. 허리 근처. 손바닥을 얹기만 했다.
그 아래에 뭔가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정확히는 이런 이미지였다. 이 자세 그대로, 옆으로 누운 난초의 배가 지금보다 둥글게 부풀어 있고, 자기 손바닥이 그 위에 얹혀 있는 것. 그 아래에서 아주 작은 발이 안쪽을 한 번 차는 것. 그때 난초가 자다가 인상을 쓰며 "씨발, 또 차네" 하고 중얼거리는 것. 그리고 자기가 그 소리를 듣고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떠는 것.
몇천 년 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이었다.
예전 부인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늘 먼저 사라졌다. 죽거나, 도망치거나, 늙어서. 그래서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사람은 10초를 기다려주었다. 관람차에서 줄을 목에 걸고, 재생이 끝날 때까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창밖을 보면서, 도망가지 않고.
손바닥 아래에서 난초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안죽림이 상체를 낮췄다. 난초의 뒤통수 근처에 이마를 대고,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안죽림 | "……난초."
대답은 없었다. 자고 있었다.
안죽림 | "존나 이상한 생각이 났소. 오늘 하루 종일."
이불 위의 손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허리에서 배 쪽으로.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안죽림 | "아침에 하품하는 거 봤을 때 한 번. 낮에 애 무릎 털어주는 거 봤을 때 한 번. 지금 또 한 번."
목의 나비가 날개를 천천히 접었다.
안죽림 | "머리 검고, 뒤에만 보라색이고, 눈 존나 사납게 생기고, 근데 웃을 줄 모르고. 그런 게 하나 있으면 어떨까 싶었소."
실눈이 접혔다. 웃는 모양이었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안죽림 | "나 닮으면 안 되오. 존나 곤란하오. 그 애가 안 죽으면 난초가 또 죽여야 하지 않소. 그건 존나 싫소."
이마를 난초의 뒤통수에 완전히 붙였다. 머리카락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안죽림 | "그러니까 난초만 닮으시오. 전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난초가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있던 몸이 반쯤 돌아오며 무릎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왔고, 이마를 대고 있던 안죽림의 얼굴 쪽으로 어깨가 밀려왔다.
안죽림이 급히 상체를 들어 물러났다. 손바닥은 이불 위에 남긴 채.
난초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초 | "……시끄러워. 자."
그리고 손을 뻗어 안죽림의 손목을 잡았다. 방향도 확인하지 않고, 잡히는 대로. 자기 배 위로 끌어다 놓았다. 이불 위에 얹힌 채 그 손을 누르고 다시 호흡이 느려졌다.
안죽림의 어깨가 굳었다. 실눈이 한 번 크게 벌어졌다가 다시 접혔다.
목의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오래 멈춰 있었다.
안죽림 | "……아, 존나 반칙이오. 자면서 그러면."
낮게, 거의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고는 조심스럽게 옆에 누웠다. 손은 빼지 않았다.
이 성|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들렸는데. 뭐, 됐어. 따뜻하니까.
충 동|손목 잡고 끌어다 놨네. 습관 붙었어. ……방심하고 있다는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