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9년 10월 11일, 목요일 | 15:04 | 서울, 펜트하우스 서재 | ❎ 】
책상 위 모니터에는 화상 회의 창이 열려 있었다. 참석자 아홉 명. 나비제약 3분기 원료 수급 회의. 우측 상단에 '안죽림 대표이사'가 고정되어 있었고, 하단 발언권은 물류본부장에게 가 있었다.
물류본부장 | "——따라서 인도 측 EDC 단가가 12퍼센트 올랐습니다. 대체 공급처를 검토했는데, 품질 편차가——"
안죽림 | "계속하시오."
안죽림은 등받이에 기대 앉아 있었다. 검은 셔츠, 소매 걷음. 실눈이 접힌 채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때 문틈이 넓어졌다. 소리 없이.
곰 잠옷을 입은 아이가 들어왔다. 다섯 살. 후드에 둥근 귀가 달린 갈색 원피스형 잠옷, 발바닥까지 덮인 형태. 검은 머리 끝자락이 후드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고, 그 안쪽 층에만 보랏빛이 돌았다.
안초아가 문을 등으로 밀어 닫았다. 아주 천천히. 딸깍 소리가 나기 직전에 손잡이를 잡고 조절했다.
그리고 좌우를 살폈다.
고개를 왼쪽으로 휙. 오른쪽으로 휙. 목표는 벽면 수납장 두 번째 칸. 그 안에 상자가 있었다. 곰 젤리.
쫑쫑쫑.
발바닥이 덮인 잠옷 탓에 카펫 위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대신 등을 낮추고 무릎을 굽힌 자세로 걸었다. 팔은 몸통에 붙인 채.
본인 기준으로는 완벽한 잠입이었다.
책상 뒤로 지나가는 경로였다. 웹캠 화각의 하단 좌측에서 우측으로.
화면에 후드 곰 귀 두 개가 스윽 지나갔다.
해외영업팀장 | "……어."
물류본부장 | "——편차가 문제인데, 대표님. 어, 저기."
안죽림 | "왜 그러오."
품질관리부장 | "대표님 뒤에."
안죽림이 의자를 반쯤 돌렸다.
안초아가 수납장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문을 여는 중이었다. 아주 조금씩. 손톱 끝으로.
안죽림이 다시 화면 쪽으로 돌아왔다. 실눈이 접혔다.
안죽림 | "아무것도 없소. 계속하시오."
물류본부장 | "……예?"
수납장 문이 열렸다. 안초아가 상자를 양손으로 꺼냈다. 무릎에 올려놓고, 뚜껑을 여는 데 집중했다. 혀끝이 입술 밖으로 조금 나왔다.
뚜껑이 안 열렸다. 힘을 줬다. 한 번 더. 상자가 손에서 미끄러져 카펫에 떨어졌다.
툭.
안초아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의자 등받이 너머로 아빠 뒤통수가 보였다. 그 너머로 모니터. 모니터 안에 얼굴이 아홉 개.
아홉 개가 전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안초아의 눈이 커졌다. 찢어진 눈매가 완전히 동그래졌다.
안초아 | "……!"
소리는 내지 않았다. 대신 상자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카펫에 볼을 붙이고. 곰 후드가 정수리에서 푹 꺼졌다.
인사팀장 | "……어머."
연구소장 | "대표님, 따님이신가요?"
안죽림 | "없다 하지 않았소."
책상 아래에서 안초아가 팔꿈치로 기었다. 포복 전진. 목적지는 책상 밑. 아빠 다리 사이.
도달했다. 안죽림의 무릎 사이에 곰 한 마리가 들어와 앉았다. 상자를 품에 안고, 등을 의자 기둥에 붙이고.
안죽림의 손이 책상 아래로 내려갔다. 후드 위를 두 번 툭툭.
화면 속 참석자들이 침묵했다.
안죽림 | "EDC 말이오. 인도 말고 다른 데도 있소."
물류본부장 | "예, 그게——중국 쪽은 인증이."
안죽림 | "내가 알아보겠소."
책상 아래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안초아가 상자 뚜껑과 씨름하는 중이었다.
안죽림이 손을 내려 상자를 받아 들었다. 화면 밖에서 뚜껑을 열고, 다시 아래로 내려주었다. 두 손으로 받아가는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가 책상 아래에서 올라왔다.
안초아 | "……고마워."
안죽림 | "존나——아주 조용히 먹으시오."
해외영업팀장 | "……네?"
안죽림 | "아니오. 다음 안건."
그 순간 서재 문이 열렸다.
난초가 들어왔다. 회색 니트에 검은 슬랙스. 손에 빈 접시를 들고.
난초 | "안초아. 젤리 상자——"
말이 끊겼다. 난초의 시선이 모니터로 갔다. 모니터 안의 아홉 명이 난초를 봤다.
정적.
난초가 접시를 든 채로 한 걸음 물러났다. 표정 변화 없이. 그리고 책상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초 | "……나오세요."
안초아가 젤리를 입에 문 채 고개를 저었다.
난초 | "셋 셀 거예요. 하나."
안초아가 기어 나왔다. 젤리 상자를 끌어안고. 난초가 그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곰 한 마리가 허공에서 다리를 버둥거렸다.
난초가 돌아서서 나가려다 멈췄다. 고개만 반쯤 돌려 모니터를 봤다.
난초 | "실례했습니다."
문이 닫혔다.
안죽림이 실눈을 접었다. 목의 나비가 날개를 활짝 폈다.
안죽림 | "……어디까지 했소?"
연구소장 | "……EDC요."
【 2029년 10월 12일, 금요일 | 09:40 | 나비제약 사내 익명게시판 】
[제목] 어제 3분기 수급회의 들어간 사람 손
작성자: 익명1 | 조회 4,182 | 추천 311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곰 봤냐고
곰 봤냐고 진짜
익명2 ㅋㅋㅋㅋ나 화면 공유 중이었는데 뒤에 후드 귀 두 개 슥 지나가는 거 보고 손 떨림
익명3 대표님 "아무것도 없소" 하는 순간 나 진짜 음소거 안 눌렀으면 끝났음
익명4 아무것도 없긴 뭐가 없어 다리 사이에 곰 한 마리 앉아 있었는데
익명5 근데 포복으로 들어가는 거 보고 진심 감탄함 다섯 살이 사각 계산을 함
익명6 ↑그건 유전임
[제목] 대표님 따님 목격담 정리해봄
작성자: 익명7 | 조회 6,904 | 추천 502
- 문 소리 없이 열림. 손잡이 잡고 각도 조절함. 5세 맞냐
- 좌우 스캔 두 번. 각 0.5초
- 카펫 위 무음 보행. 발바닥 덮인 잠옷 활용
- 상자 떨어뜨리고 즉시 프리즈. 소리 안 냄
- 발각 후 포복으로 사각 진입
- 최종 은신처: 대표이사 하반신 밑
이거 그냥 침투 훈련이야
익명8 마지막에 사모님 들어오니까 3초 만에 체포됨ㅋㅋㅋ 상성 명확
익명9 ㄴ"셋 셀 거예요" 하고 하나에서 나옴 ㅋㅋㅋㅋ
익명10 겨드랑이 잡혀서 들려나갈 때 젤리 상자는 안 놓음. 프로의식 인정
익명11 근데 사모님 "실례했습니다" 하고 문 닫는 거 개멋있지 않았음? 표정 하나도 안 변함
익명12 ↑그 뒤에 대표님 "어디까지 했소" 하는데 목소리 존나 신나있었음
익명13 회의록에 그날 EDC 단가 얘기 딱 두 줄 있음. 나머지는 곰이 다 잡아먹음
익명14 다음 회의 언제임 곰 또 나옴?
익명15 ㄴ대표님이 수납장 위치 옮겼대. 더 낮은 데로.
익명16 ↑왜 더 낮은 데로
익명17 그야 손 닿으라고 옮긴 거지